늦가을 날씨에 한기가 감돌던 지난 7일 중부전선 백골부대 (육군 보병 제3사단) 사령부 故 임상택(林相澤) 소령 ‘돌 격상’ 앞에서 사단 군악대의 구슬픈 진혼곡과 17발의 조총 소리가 철원계곡에 울려 퍼졌다.
사단장 (남영신 소장) 임석 하에 임상택 소령의 군 동기생 (갑종간부 제157기), 갑종간부 선배인 노무식 예비역 소장 (6ㆍ25참전 유공자회 부회장), 김영갑 예비역 소장 (갑종장교 전우회장), 미망인 임봉자(任鳳子) 씨가 참석한 ‘임상택 소령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임상택(1938) 소령은 1968년 월남전에 참전, 백마사단(보병 제9사단)에서 군 동기생이며 중대장이었던 황정택 대위가 전사하자 참모장교였던 임 대위가 황 대위의 뒤를 잇게 되었고, 파월 만료 기간인 1년이 되자 귀국 명을 받고 철원 백골사단 중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의 휴전선은 나무를 잘라 만든 목책으로 적의 침투를 막기에 허점이 많았다. 증가일로에 있던 적의 침투에 대비하여 군은 155마일 휴전선 전역에 허술한 목책 대신 견고한 철책선과 대전차 방벽설치 공사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던 때였다.
임 대위가 지휘하는 중대도 예외 없이 철색선 방벽설치 공사에 진력하였다. 그때 철조망을 끌고 가던 1개 분대(7명)가 철조망 가시에 부비추렙용으로 쓰려고 옆에 두었던 수류탄 안전 고리가 꿰어 지나가고 있었다.
안전 고리가 풀어진 수류탄을 목격한 임 대위가 몸을 날려 수류탄을 몸으로 덮치는 찰나에 수류탄은 폭발하였다. 그래서 임상택 대위는 장렬하게 전사하고 그의 부하 7명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국방부는 임상택 대위를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백골사단 지휘소 앞에 실물 크기의 이름이 없는 ‘돌격상(突擊像)을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임 대위의 이름은 점차 잊혀 졌고 무명의 돌격상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이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10여 년 전, 사단장으로 부임한 안충준 소장(육사 25기)이 자기 사무실 앞에 서있는 허름한 돌격상이 언제부터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단장은 백골사단 부대 역사일지를 매일 밤 탐독하게 되었고, 그 돌격상의 주인공이 임상택 대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충준 사단장은 임기 중에 세계 평화유지군(PKO) 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임 소령의 전사를 재조사하도록 국방부에 요청하였고, 그때야 임 소령의 군 동기회도 알게 됐다.
군 동기회에서는 임 대위가 출생한 울산과 그가 졸업한 부산 해동고등학교, 입대 전에 재학 중이던 동아대학교에 이 사실을 알리고 군 동기회가 주축이 되어 모금과 ‘유족 찾기’ 운동을 펼쳤다.
한편으로 임 대위가 임관했던 육군보병학교 교정에 임상택 소령의 흉상을 세우고 학생관 이름을 ‘임상택관’으로 명명했다. 또한, 그가 전사한 백골사단 지휘소 앞 무명의 ‘돌격상’을 보수하여 이름과 사진, 약력을 새겨 넣었다.
지난해 국방부는 자신을 버리고 부하 7명을 살린 임상택 소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재조사후에 임 대위의 공적사실을 높이 평가, 1953년 휴전 후 두 번째로 ’호국인물‘로 선정하였다.
남영신 백골 사단장(ROTC 23기)은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이란 보병 제3사단 구호에 어울리는 임상택 호국인물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우리 보병 제3사단은 매년 모범중대장을 선발하여 ’임상택 돌격상‘을 재정 시상하고 있다“고 했다.
갑종 제 157기 김종하(79) 동기회장은 “ 이제 우리 동기들도 모두 80세 전후의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걸을 수 있고, 차를 탈 수 있는 날 까지는 임상택 소령의 ‘돌격상’ 앞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대전에서 온 미망인 임봉자 씨는 46년 전 유복녀 하나를 남겨주고 떠난 남편이었지만, 그 유복녀가 효녀이고, 남편의 동기생들이 모두 친동기같이 대해주니 고맙기 한량없습니다. 정부에서도 매달 유족연금을 주니 이제 노후는 외롭지 않게 잘 살아갈 것입니다“고 했다.
실버넷TV 황재영기자 hjy27@silvernet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