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가을 단풍 지로 손꼽아 한 번쯤은 아기단풍과 눈 맞춤하고 발 도장을 꾹꾹 찍었을 내장산이 고요함에 가두어져 있다. 화려한 환호를 내지르던 사람들이 많아 길을 걷는 게 아니라 부양하며 뒤따라 떠밀며 갔었다. 앞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짧은 호흡만 하다가 푸념하며 되돌아간 적은 왜 없을까.
올망졸망 아기 손바닥만 한 단풍들이 손 내밀고 반겨 맞던 아기단풍 터널 속으로 들어가 본다. 휘익 바람 소리와 휑한 겨울 산자락에 일찍 다녀간 산객 발자국이 눈 위에 남겨 있다.
시린 듯 파란 하늘에 서래봉은 아기자기한 예쁜 봉우리이다. 아래에서 온전히 다 볼 수 있다니 계를 탔거나 완전 복 받은 날이다.
선연히 붉어진 단풍 한 주먹 주워들고 하늘로 던져 어디에서 본 듯한 연출도 해본 곳이다. ‘꽃은 떨어지면 줍는 사람이 없어도 곱게 물든 낙엽은 주워서 책갈피에 꽂지 않더냐.’ 잘 죽는 방법을 설법한 어떤 스님의 말이 겹쳐 생각나 단풍 한두 장 골라 보기도 했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은 왜 스치나.
차가운 바람도 쌓인 눈도 방해물이 아니다. 겨울 산속 해는 노루 꼬리만 하다고 하지만, 등지고 걷는 등허리가 따뜻해져 손을 뒤로 해를 만져본다. 해가 등에 붙어 따라왔구나!
아름다움이 영원하지 않음을 산 나무는 전신을 드러내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연의 예술적 표현 도구는 호들갑 떨지 않으니 차갑거나 무거운 질감을 동시에 맛봐도 된다. 겨울 색은 온몸 부르르 떨어 만든 사색과 흰색으로 나타내어도 신비감이 있다.
알록달록 등산복 산객 무리가 자지러지게 웃다 남긴 소리가 실가지 꼭대기에 매달려 있다. 아기단풍나무길 머리 맞대고 새로운 색깔로 색다른 웃음 만들어 줄 거라고 소곤거리며 줄지어 그냥 서 있다.
조용한 산 적막을 깨며 맑은 물소리가 바위를 비켜 흐른다. 깊은 물은 소리 안 내고 얕은 물은 요란하다고 비꼬아 말해도 바닥이 보이는 맑은 시냇물 소리 들으면 쫓아가 보고 싶어진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어떤 그리움과 안타까운 미련도 있고 이별하는 슬픔도 있는 김소월의 ‘가는 길’이 어울려 준다.
응달 눈길 미끄러질까 한 걸음을 대여섯 발로 나눠 딛고 달리듯 눈길을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발품 팔아 찾으니 아무 곳에나 사진기를 들이대도 멋진 작품이다. 오히려 바람 한 점 넣은 애잔함이 들어가 훌륭한 액자가 된다. 반영 사진으로 유명한 우화정 호수에 물은 얼고 눈으로 덮여있다.
가려고 발길을 돌리니 거친 바람도 맞아보라고 음울한 색깔의 산을 쓸고 내려와 몸속으로 파고든다. 한바탕 함성을 내지르던 그들이 목이 쉬었는지 더 조용하고 한적하다. 돌아서서 한 번 더 보고 간다. 이런 애상적 정서를 은근 즐기는 이에게는 내장산의 겨울이 좋다.
시간 지나면 빛바랜다는 세상 이치를 뚜렷이 온몸으로 알려 주는 겨울 내장산이다. 인간은 유한하다고 목탁 소리만 쩌렁쩌렁 산을 흔들고 있다.
강희순 기자 hisuni@silvernet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