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만주는 1775(21세)부터 죽기 1년 전인 1787년(33세)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으며 이것을 1년이나 반년 단위로 묶어 ‘흠영(欽英)’이라고 불렀다. 흠영은 ‘꽃송이와 같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는 뜻이었다.
그의 삶은 평생 과거에 응시했을 뿐 특별한 게 없었다. 놀랍게도 흠영이라는 24권의 일기가 남겨져 그 시대의 삶과 시대상을 알 수 있기에 큰 가치 인물로 여겨졌다.
그는 “나는 글을 잘못하였지만, 나의 글은 ‘흠영’에 있고 나는 시를 잘 쓰지 못하였지만, 나의 시는 ‘흠영’에 있으며 나는 말을 잘못하지만, 나의 말은 ‘흠영’에 있다.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라고 말하고 “‘흠영’은 완성하지 못한 글이니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기도 34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유만주의 1784년의 일기를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구분하여 대표되는 일기를 알기 쉽게 그림을 그려 확대 전시했으며 ‘흠영’에 나오는 내용을 서적이나 유물들을 전시했다.
1784년은 평화로운 한 해였다. 영조 임금이 즉위한 지 8년째에 이르는 해로 정치는 안정적이었고 큰 기근이나 역병이 없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책봉을 기념한 과거 시험이 열렸고 청나라 축하사절단이 방문하여 축제 분위가 절정에 달했다.
1월 갑진년을 맞아 차례를 지낸 일, 친척에게 서신과 선물을 보낸 일, 친구들과 음식을 먹고 다리밟기를 한 일들이 적혀있으며 윤 3월에 한양의 봄꽃을 구경한 일, 4월에 해주와 평양에 유람한 일, 6월에 집 주름과 책 주름에게 선물한 일, 7월에 고질적인 눈병에 대한 어려움, 8월에 명동의 새집으로 이사한 일, 9월에 세자 책봉 기념 과거에 응시하며 10만 명이 넘는 응시자와 그 수종을 드는 수인들에 따른 과거시험에 대한 폐단을 적나라하게 적었다.
유만주는 평생 5,000여 종의 책을 읽었으며 경전, 역사서, 제자 백가서, 지리지, 야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일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몰두하였으며 10월에는 유행하는 중국소설을 읽은 이야기를 많이 썼다.
11월에는 담헌 홍대용 대감 집에 간 이야기들이, 12월에는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을 적었다.
1784년 서른 살이 된 유만주는 해주 판관인 아버지 덕에 가계 경제가 좋았으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명동에 2,000냥을 주고 이사를 했으며 크고 작은 집안일을 처리했으며 과거 시험을 준비한 해였다.
그러나 1785년 이후의 유만주의 집안은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가 관직에서 파직되고 집안 형편이 급격하게 나빠져 작은 집으로 이사하였으며 큰아들이 병석을 헤어나지 못하고 둘째 아들을 잃었으며 그는 과거시험에도 연이어 낙방하였다. 그래도 그는 자신을 포함한 서울 사람들의 생애를 일기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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