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도 권위 있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최고의 상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 영화사상 처음이다.
영화가 우선 재미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릴과 풍자, 유머가 있고 예측불허의 반전이 계속된다.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이면서도 공포영화와 재난영화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든다. 그래서 봉준호(50세) 감독의 재능을 돋보이게 하는, 아이디어 면에서 소위 ‘봉테일’이라는 장르를 완성하고 있다. 따라서 전 세계 192개국에 상영이 계약되어 한국영화사상 최다 판매 신기록을 수립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개봉 이후 네티즌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영화는 순수 예술이기 전에 사람들의 영혼을 순화하는 측면이 있어야 하고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어야 한다.
우선 선정적(煽情的)인 장면이나 잔인한 살인 장면에서 관람 등급을 15세 이상보다 19세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는 평이다.
이 영화를 얼핏 보면 빈부의 격차를 고발하는 영화같이 보이는데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빈부의 격차는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그런데도 이 영화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부(富)의 평등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도 빈부의 격차는 있지만 잘 사는 나라라고 한다.
베네수엘라나 세계 10대 빈국에도 빈부의 격차는 있어서 굶어 죽는 사람과 그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이 영화에서 글로벌 IT기업의 젊은 CEO 박사장(이선균)은 호화저택에서 잘 살지만, 사업에 실패한 50대 가장(家長) 기택(송강호)은 달동네 반지하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어렵게 살고 있다.
기택이 못사는 것은 박 사장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닌데 마치 부자들의 돈은 부당하게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나누어 써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더구나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끝까지 살아남는다.
물론 자기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죽였다고는 하지만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여도 좋다는 사상을 부추기는 이야기라면 걱정이다. 50%나 되는 IQ100 이하의 어린 백성들은 그렇게 속아 넘어가기 쉽다.
과거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해서 혁명을 일으킨 나라도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 장군의 출현으로 프랑스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의 독재로 공산당원만 잘살게 되고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해졌다.
지금은 중국을 필두로 공산국가는 모두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표방(標榜)하고 있다.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부자나라가 된 영국의 제1차 산업혁명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4차산업혁명을 일으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 다 같이 일자리를 갖고 잘 살도록 하고 중산층을 많이 만들어서 극빈자(極貧者)의 수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극빈자에게 적선할 사람들이 많아져 최소한도 굶어 죽는 사람이나 탈국민(脫國民)이 없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