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40명을 태운 버스가 강진으로 달려가 하나라도 더 설명해 주고자 애쓰는 해설사를 만납니다.
만덕산 백련사 현판을 보면서 일주문이 호적과 같다는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현판의 글자가 멋있어서 보고 또 보고했습니다.
서예가들에게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하겠습니다.
일주문에 들어서자 동백 숲이 펼쳐진 자리에 시 한 수 있습니다.
백련사 숲길에서 /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강진 다산 초당 ~ 백련사 간 숲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길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우거지고
포장된 아스팔트가 아니고 낙엽이 켜켜이 쌓여 스펀지 밟는 폭신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까 땅만 보고 걷다 보니 새로운 친구도 만납니다.
촉촉한 숲속에 달팽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데 큰 것을 만났습니다.
집을 등에 지고 오른쪽으로 감긴 커다란 달팽이를 만나서 건드려보기도 했습니다.
천남성은 토양이 비옥하고 물 빠짐이 좋은 습기가 많은 곳에서 서식합니다.
남쪽에 뜨는 별 이름인데 이 식물의 성질이 양기가 강해 별 중 가장 양기가 강한 천남성을 빗대어 붙인 이름이랍니다. 유독한 식물이래요. 조선의 사악한 여인 장희빈에게 내린 사약이 천남성 뿌리의 가루라하지요?
백일 동안 피고 진다는 백일홍 나무가 만경루(萬景樓) 앞에 있다.
누마루 밑의 통로를 통해 백련사로 드나들 수 있도록 누하 진출입 방식이다.
막힘없이 펼쳐진 자리에 강진만이 보이자 사진 한 장씩 찍어봅니다.
백련사를 나와 동백 숲길을 다시 걷습니다.
인고의 세월 잔혹함인가! 나무등걸에 심한 아픔이 있는 동백나무들을 봤습니다.
어려움 이겨내고 핀 꽃이라서 그리 붉더냐고 길손이 묻습니다.
초당을 향해서 느긋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걷는 걸음이 좋았습니다.
급하지 않은 내리막길에서 서로에게 조심하라는 말도 해주며 저절로 고개를 숙이며 걷고 있습니다.
조붓한 오솔길에 10살 아래인 혜장스님과 다산이 나란히 걸었을 그 길
목판에 쓰인 글을 보면 /백련사 가는 오솔길 / 찌뿌듯한 하늘이 맑게 갠 어느 봄날, 냉이밭에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자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판이 시작되는 보리밭을 지나며 그는 탄식했다. “나도 늙었구나. 봄이 되었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 백련사에서 혜장선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벗 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
다산동암(茶山東庵) 자신의 숙소,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보정산방(寶丁山房) 제자들의 숙소,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다산초당(茶山艸堂) 원래는 초가였지만, 복원하면서 기와로 올렸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1808년 봄 다산 선생이 초당으로 이주 후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정석(丁石) 정약용이 이곳에 머물면서 손수 새긴 각자
뿌리의 길, 주변 나무뿌리가 밖으로 드러나 있다.
언덕을 내려오면 귤동마을 돌담길이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다고 다산(茶山)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다산은 이곳에서 얻은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