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는 고려 광종 때(969년)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여 함경도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조선조 세종 때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이 절을 폐사(閉寺)하였다. 그 후 예종 때(1469년) 정희왕후 윤씨가 광릉에 세조를 모시고 이 절을 원찰(願刹)로 정하여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라는 뜻으로 봉선사(奉先寺)라 개명하였다.
1551년 명종 때 문정왕후가 불교중흥정책을 펴면서 봉은사를 선종(禪宗)의 우두머리 사찰(禪宗首寺刹)로, 이곳 봉선사를 교종(敎宗)의 우두머리 사찰(敎宗首寺刹)로 삼았다. 그 후 여기서 승과시라는 과거를 치르기도 하였고 임진왜란과 6.25 전쟁 때는 화재로 여러 번 수축(修築)했다.
그리고 봉선사 입구에는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있는데 이 절의 주지인 운허스님과 친척인 춘원이 이곳에서 칩거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소설가로 잘 알려진 춘원은 독립운동가,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독립신문사 사장, 시인, 문학평론가, 교육자 등으로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힌다.
춘원은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후 조국의 독립운동에 전념하였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38년 자신의 스승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가 병사하자, 이광수는 커다란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그는 이 무렵 3만8천 명에 이르는 ‘조선 사상범’들을 일제가 검거할 것이고 남경학살과 같은 수법으로 학살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때 홍난파, 현제명의 이탈을 비판하면서도 커다란 고뇌에 빠진다. 그리고 일제(日帝)에 개죽음을 당하느니 많은 한국인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조국광복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졌다.
1939년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1940년, 창씨개명제가 시행되기 시작한 날에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고친 새 이름으로 제1호 창씨개명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죽지 말고 학도병에 지원하라는 연설을 한다.
해방 후, 경기도 사능에 칩거했던 춘원은 친일변절자로 낙인이 찍혀 자기의 진심을 잘 알아주던 운허 스님이 있는 봉선사로 입산한다. 그리고 이때 돌베개, 원효대사, 꿈과 같은 불교소설 등 대작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운허스님의 대장경 역경(譯經)을 도왔다.
김진홍 기자 yacho44@silvernet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