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서의 처음 10일간은 하루 평균 75개의 징크들이 물길을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강에는 매우 많은 수의 유동 인구가 존재하였다. 전 구간에 걸쳐 교량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정부가 운행하는 47개의 무료 여객선으로 왕래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에 와 서울에서 단양의 영춘까지 한강을 배로 돌아봤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실린 기록이다. 영국이나 유럽의 발달한 해운 문화에 익숙한 그녀의 눈에는 넓고 긴 한강에 다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무척이나 의아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외침을 막아낼 만한 역량을 제대로 갖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외적의 침입을 막는 소극적 방위 전략으로 강에 다리를 놓지 않았다. 대신 작은 내에는 징검다리나 나무다리를 놓았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에 참패한 청나라 장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들었던 패인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다리가 유약하기 때문에 말이 끄는 야포 하나를 나르는 데도 주저앉곤 해서 작전이 늦어졌다”라고 했다 한다.
일본의 장군들 역시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다리가 없어 강줄기를 따라 수심이 얕은 상류까지 돌아가야 하는 바람에 작전 지연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했다 한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1902년 음독 자결한 보수파 학자인 이병선은 “만약 조선의 길이 넓고 다리가 탄탄했더라면 조선 역사는 잦은 외침에 찢겨 아예 남아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유서를 썼다.
그의 말처럼 조선은 길과 다리가 없어서 그나마 유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은 강들의 운송수단은 나룻배가 유일한 것이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강에 놓인 다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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