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은 고려 말기 충혜왕 때 지금의 경북 영주시 서천(西川) 강가에서 태어났다.
이 고택(古宅)에서는 정도전의 부친 형조판서 정운경, 공조판서 황유정, 이조판서 김담 등이 태어나 사람들은 삼판서 고택이라고 한다. 정도전은 부친이 관직에 나가자 개경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박상충 등 훌륭한 학자들과 교류하며 공부하였다. 그도 22세(공민왕 13년)에 과거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출생했을 때는 고려의 왕이 7명이나 바뀔 정도로 정국이 혼란한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공민왕이 제일 영민(英敏)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유교 개혁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공민왕에게 협조적이던 왕후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거의 실성한 사람이 되어 이상한 짓을 많이 했다.
그때가 정도전이 관직에 나간 이듬해였다. 중국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세도정치와 부패한 불교계의 사이비 승려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백성들을 착취했다. 그중에서도 중, 신돈은 정신이 혼미한 공민왕을 꼬드겨 궁중에까지 드나들며 사악한 만행을 일삼았다.
이러한 정국(政局) 속에서 관리들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각 정파의 이익만을 위하여 정쟁(政爭)을 일삼고 뇌물 수수와 조세포탈(租稅逋脫)로 각자 자기 가문의 재산을 치부하는 데 골몰(汨沒)하였다.
또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을 학살하고 노략질하는 데도 이를 수수방관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정도전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토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는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신념을 다지기 시작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장자방을 자처하며 한 고조 유방의 역할을 할 장군을 찾아 나섰다. 때마침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
장군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성계 장군이 썩은 정치판을 뒤엎고 위민(爲民)정치를 베풀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는 이성계 장군이 왕위에 오르도록 진력(盡力)하여 토지 개혁을 시행하고, 부패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 한양 천도를 적극 지지하여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고 건설 공사를 총지휘했다. 경복궁과 각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漢城府)의 5부 52방 이름도 그가 지었다.
그가 태조 이성계를 위해 저술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그의 정적(政敵)이던 이방원과 그의 아들 세종대왕이 그대로 이어받아 조선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600년 후 박정희 장군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동향인(同鄕人)인 그의 저서(著書)를 많이 참조하였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