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장 문화재 야행

인천 드림을 꿈꾼 곳
인천 이야기, 갑문식 도크를 건설할 때 일본은 우리나라 죄수들을 인부로 썼다

 

한적한 어촌에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배가 들어올 수 없어 배를 항상 댈 수 있는 정거장 갑문식 도크이다. 갑문식 도크를 건설할 때 일본은 우리나라 죄수들을 인부로 썼다. 갯벌공사가 너무 힘들어서 죄수들은 죽고 싶어도 두 사람씩 서로 묶어 놓아서 죽지도 못했다.

김구선생도 죄수로 인천에 왔는데 인천시민의 도움으로 두 번씩이나 탈출할 수 있었다. 김구선생이 광복 후에 지방 순시할 때 인천을 가장 먼저 방문했다는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1876년에 맺어진 강화도 조약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수탈이 시작되며, 그들의 주거공간인 조개지가 만들어진다. 일본조개지에서는 일본인의 법대로 하는 치외법권을 실시했다.

일자리를 찾아 하와이로 떠났던 교포들은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면 공업학교를 세워야 한다며 성금을 보내왔다. 각자 고향은 다르지만 제물포에서 떠났기 때문에 그들의 고향은 인천 제물포였던 것이다. 인천에 공업학교를 세우라고 돈을 보내왔다. 그렇게 인하공전이 세워진 것이다.

 

다리 위에서 일본 처녀가 볼일을 보고 있는데 한국청년이 볼기를 냅다~~ 감히 대일본 사람을 때렸다고 일본처녀가 경찰서 갔다가 ‘대 일본제국 국민이 그런 짓을 하다니..’ 일본경찰로부터 혼쭐이 나고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서글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임오군란 때 청군이 올 때에 상인들도 같이 왔던 사람들이 차이나타운을 구성했다. 중국인들이 인천드림을 꿈꾸며 인천으로 와서 노동일을 하며 값이 싸고, 빨리 먹고, 내가 고향에서 먹던 탈이 없는 음식인 짜장면을 점심으로 먹기 위해 부둣가로 몰려들었고, 하나 둘 생겨난 것이 짜장면의 내력이 되었던 것이다.

 

실버넷 TV 배정인 기자

실버넷 TV 손공자 기자

실버넷 TV 최진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