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성지(舟論聖地)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
한국 천주교회사의 진원지.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회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1791년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 마을이 위치한 계곡이 배(舟) 밑창을 닮았다 하여 배론(舟論)으로 불렸다.’<다음 백과에서>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던 곳이고 1855년에는 우리나라 첫 번째 교구 사제양성을 위해 세워진 성 요셉신학교가 1866년까지 신학교육을 했던 곳이다.

황사영(알렉시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피신하여 글 쓰는 일로 소일한다.

박해의 소식과 신부의 순교사실을 듣고 박해의 경과와 교회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토굴 속에서 백서를 쓰기 시작한다.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으며 백서는 압수된다.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저장고를 가장하고 있었으며 그 넓이는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넓이라고 생각된다.’ <배론성지 홈페이지에서>

 

<방순열 /해설사> “산골짜기가 많은데 왜 하필 여기 숨어 살았느냐 하면… 천주교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 좋았던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아주 산골이었어요.

둘째, 땅 모양이 점차 높아져서 포졸이나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발견하기 쉬었고.

셋째, 산 너머가 울고 넘는 박달재에요.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아주 중요한 통로였기에…

골짜기가 배 바닥처럼 생겼다’는 데서 생긴 마을 배론이라는 지명을 형상화 하였으며

천장은 방주 모양으로 지어졌고 가운데는 자연채광이 되어 불을 안 켜도 환하다.

최양업신부 일대기를 적어놓은 곳이며 납골당이다.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 싼 산골마을로 계곡이 깊어 숨어살기 좋고, 관측하기 좋고, 도망가기 좋았다.”

배 모양으로 건축된 최양업 도마신부 기념성당 앞에 세워진 최양업도마신부상

황사영순교현양탑 관복을 입고 하늘을 향해 받드는 상.

북한에서 제작하여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고 .

황사영 백서가 쓰인 토굴.

배론 신학교 2003년 복원 충북 지방문화재 제118호.

<여행사 가이드> “저 조그마한 천에 작은 붓으로 13,000여 자를 얼마나 고생하며 썼을까…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개였어요. 우리나라가 이런 박해를 받고 있다는 거를 알리는 거였고요.

우리의 힘으로 이거를 없앨 수 없으니 청나라 바깥의 힘이 우리를 도와다오…”

 

집으로 돌아오기 바쁜 여정으로 버스 안에서야 예전에 교과서에 올려 있었던 가물가물한 백서 내용을 되새긴다.

그 시절 그 심정 헤아림을 조금이나마 하면서 눈을 감고 생각한다.